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4 셔먼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60.tinypic.com/6glim9.jpg|width=100%]]}}} || || '''신포탑 치하를 상대하는 M4A2 삽화''' || >(전략)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굉음은, 살펴보니 거의 이, 삼십대의 '''대형전차 같았다.''' M4형 전차의 '''위력은 [[넘사벽|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코스믹 호러|벌레와 개미처럼 쉽게 뭉게질 것]]이 당연했다. 그 섬뜩한 캐터필러 소리는 우리를 "도망쳐", "도망쳐" 라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전진![* 앞으로 가라는 뜻의 전진(前進)이 아니라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라는 뜻의 전진(転進)이다.]" 이시하라 중대장은 즉시 전진 명령을 내렸다. '''전진은 퇴각하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략) >[[삼십육계|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거대한 전차무리에 따라잡히지 않도록 도망에만 열심이었다.]] 중대는, '''사나운 호랑이에 쫓기는 양처럼,''' 등뒤의 늪 속으로 흩어지며 뛰어들었다. >하지만, 뛰어든 것은 좋았지만 힘든 장소였다. 그 늪에는 [[악어]]도 있고 독충도 서식하고 있었다. 늪을 건너다 어디에서 덮쳐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거대한 "육지의 [[전함]]"에게 짓밟히는 것만은 못한 것이었다.''' >---- > -[[후나사카 히로시]] 저.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 전투|앙가우르전기]]』'''(英霊の絶叫―玉砕島アンガウル戦記) p. 24~25 >"미국 지상군과의 전투는 실질적으로 '''M4 전차와의 전투이다.'''" >---- > [[오키나와 전투]] 중 일본 제32군 명령 제13호 유럽 전선에서 비록 많이 밀리기는 했다지만 자기보다 체급이 높은 중전차를 상대로 대단히 선전했었던 것 이상으로, 똑같이 섬에 상륙해서 전차를 운용하는 입장인 일본 제국과 싸운 태평양 전쟁에선 역으로 높은 체급차로 큰 활약을 했다. [[일본군]]은 미 해병대가 대전차 전투보다는 밀림 속을 밀고 들어가기 위해 투입한 M4 셔먼을 맞닥뜨리자 '[[악마를 보았다|악마를 만났다]]'면서 패닉에 빠졌다. 거기에다가 '뭐라도 움직이는 것만 보이면 일단 쏴대고 보는' 미군 특유의 호전적인 전투 방식 때문에 사방에서 피해가 속출, 1944년의 [[필리핀 탈환전]]에선 셔먼에게 그야말로 녹아내리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지속되며 일본군도 M4 셔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여 강점과 약점은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나름의 대전차 전술을 연구하여 셔먼 전차에 대항했으나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태평양전역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일본군에게는 성능으로 보나 수량으로 보나 '''셔먼을 상대할만한 전차나 대전차무기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보유한 그 어떤 대전차포도 셔먼에게는 이빨도 안 들어갔으며, 철석같이 믿고 있던 [[1식 기동 47mm 속사포]](대전차포)나 이 포를 전차포로 탑재한 [[치하|치하 개량형]]이 쏘는 포탄으로도 셔먼을 정면에서 격파하기가 어려웠다.[* 치하 개량형의 1식 전차포는 근거리에서 M4A2의 정면을 관통할 수 있었지만, 원거리에서는 관통할 수 없었다.] 47mm 속사포는 철갑고폭탄(APHE)를 사용할 경우 일반적인 교전거리인 460m 거리에서 셔먼의 전면장갑인 30도 경사의 51mm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었다. 거의 1km 밖에서도 셔먼을 격파하곤 했던 유럽전장보다는 못하기는 해도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꽤 희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2차 대전에서 전차가 가장 많이 피격되는 부분은 정면, 그 중에서도 바로 포탑이라는 점이다. 47mm 속사포로는 근거리에서조차 셔먼의 포탑 정면을 관통할 수가 없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4A3_tank_penetrations.jpg|width=100%]]}}} || || '''47mm 1식 속사포에 의해 측면이 관통된 M4A3''' || 일본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면과 달리 셔먼의 포탑 측면은 6-700m의 원거리에서도 격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수량도 얼마 안되는 치하 전차나 기동성이 열세한 대전차포로 셔먼의 측면을 노린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가까이 숨어있다가 지근거리 기습으로 셔먼을 잡은 몇몇 치하 개량형도 있었지만, 그 직후엔 역습을 받아서 궤멸당했다. 어쨌든 제약이 많기는 해도 47mm 속사포나 치하 개량형도 엄폐호나 대전차지뢰, 야포의 지원 및 수반하는 보병과의 협동으로 셔먼을 고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속사포든 치하 개량형이든 생산수량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52문의 47mm 속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키나와에 미 제10군이 투입한 전차는 [[17대1|무려 800대가 넘었다.]] 더욱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일본군은 제해권을 잃고 태평양 각지에서 고립되어 보급과 증원 조차 버거웠으니 숫적인 차이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결국 일본군은 "실전배치된" 가장 강력했던 전차인 '노획한' [[스튜어트 전차|M3 스튜어트]]를 끌고 나왔지만 M3 스튜어트로 체급이 확연히 다르고 화력도 월등한 셔먼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있나. 일본군이 셔먼을 제압할 방법이라고는 포병의 탄막이 운 좋게 적중하기를 빌거나 아니면 궤도를 노려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75mm, 105mm, 150mm급 야포에도 철갑고폭탄을 사용하여 셔먼에 날렸다. 하지만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빠른 전차를 대전차포도 아닌 일반 야포로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군은 미군처럼 탄착관측기나 통신이 잘 발달한 것도 아니니 이런 전술표적을 맞추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또한 대개의 경우 일본군 야포세력은 몇배는 우세한 미군 포병의 대포병 사격에 시달리거나 공습에도 취약해서 마음 놓고 미군 전차에 사격을 가할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 제국의 공업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라 신형 대전차포나 전차 개발도 빠듯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전차총검술]] 같은 어이없는 전술까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셔먼을 가장 애먹인 것은 사방에서 [[대전차총검술|"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일본군 '''[[보병]]'''.[* 그 중 하나가 바로 육군식 [[카미카제]]인 '[[후쿠류]]'. 땅파고 폭탄을 안고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자 미 해병은 '''탱크 앞에 삽을 달아서''' 만든 '불도저 셔먼'으로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래서 [[거북선|뾰족하게 만든 철판과 쇠못을 차체에 용접해서 전차를 고슴도치처럼 만들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 자기흡착식 99식 대전차지뢰를 막기 위해 측면에 나무판을 대는 등 여러가지로 일본군 보병들의 자살돌격을 막아냈다. 일본군도 부랴부랴 셔먼에 대항할 전차를 개발했지만 너무 시기가 늦어서 포탑이 달린 것 중에선 [[치헤]], [[치누]], [[치토 전차|치토]] 등을 양산했지만, 치헤는 정작 중요한 화력이 치하 개량형과 똑같았고, 치누는 75mm 셔먼과 동급의 포를 가졌지만 주퇴복좌기가 자주포마냥 튀어나온데다 앞의 그 치헤 차체에 둔중한 포탑을 포와 같이 올려서 기동성과 신뢰성이 개판이었다. 치토는 2대만 쓸 수 있어서 너무 적었던데다 시기도 늦고, 오이는 물론 충분히 격파 가능하지만 미군이 프로토타입을 노획 후 한 번만 쓰고 1952년에 폐기해버려서 오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전차자주포]]로는 치하 차체를 기반으로 만든 [[호니]]는 [[치누]]에 달린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셔먼을 전면 격파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에 가서 결전을 준비했지만 대부분의 차량이 바다의 어초가 되어버리고, 무사히 상륙한 소수의 차량으로 맞서 싸웠지만 노획당했다. 설령 최고의 포탑 장착 전차인 [[치리]]와 [[100식 전차|오이]]가 나왔다고 해도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미군이 작정하고 [[6호 전차 티거]] 대항마로 개발한 1,000여 대의 [[M26 퍼싱]] 중(重)전차였다.[* 퍼싱은 중형전차지만, 당시엔 중전차로 분류돼 있었다. 게다가 퍼싱을 이어서 나올 전차는 진짜 중(重)전차인 [[T29]] 시리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2.ec-images.myspacecdn.com/l.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4+iwojima.jpg|width=100%]]}}} || || '''위쪽은 화염방사전차 M4A3R Zippo[br]아래쪽은 불도저 전차''' || 전쟁 후반이 될수록 [[동굴]] 속에서 [[옥쇄|농성]]하는 일본군 수비대에 대항하기 위한 화염방사 전차[* 오키나와 전투의 시점에서는 사진처럼 차체의 기관총이 아닌 아예 전차 주포 자체가 불붙은 화염줄기를 최대 200m까지 뿜어내는 화염방사포로 개조된 후기형 화염방사전차가 투입됐고 1개 전차대대 분량의 화방전차가 활약했다.]와 불도저 전차같은 현지 개수형 차량도 등장했다. 화염방사 전차는 동굴이나 참호에 불을 뿜었고, 불도저 전차는 땅속을 파고들어간 뒤 [[99식 파갑폭뢰]]를 품에 안고 자폭하려는 일본군을 생매장하는데 쓰였다. 물론 세상 일이 다 그렇듯 태평양에서 비교 대상이 없던 무적의 위용을 뽐내던 셔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손실도 없이 항상 일본군을 밀어버리며 다닌 건 아니었다. 일본군도 머리가 있는 이상 자신이 보유한 구세대 대전차포나 신포탑 치하로 셔먼에 대항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미군의 선제포격에도 버틸 수 있는 반사면 진지나 견고한 대전차호를 구축해 잘 위장시켜 매복시켰다. 또한 적재적소에 대전차지뢰를 깔고 자폭병을 배치시켰다. 특히 유럽전선과 달리 태평양전선에서 전차가 활약할만한 전역 자체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섬들이 산악지대에 좁은 길이라 셔먼으로 밀고 가다보면 경사때문에 정체가 자주 있었고 그때를 노린 일본군의 자살돌격에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일본군은 이런 매복된 대전차포로 기습적인 화망을 구성, 셔먼의 약한 측면, 후면을 타격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최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통해 단련된 부대는 셔먼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시에는 착실히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의 셔먼을 상대하는 지침을 보면 가급적 측면 혹은 후면을 공격하되, 전면을 공격해야만 할 상황일 경우 포탑과 차체 사이를 노리라고 되어 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배치된 일본군 중에는 미군과 교전해본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의외로 저 까다로운 조건을 종종 맞추곤 했다.] 그래서 아무리 강력한 셔먼이라고 해도 역시 유럽에서 그랬듯이 전차의 사각(死角)을 지켜주고 정찰을 통해 적의 매복이나 위험요소를 미리 알려주는 보병과 함께 작전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잘만 했다면 더욱 강력한 시너지를 냈다.[* 실제로 미군은 전차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할 경우 상당한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이미 과달카날 전투 때부터 경험한 바 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테나루 전투에서 무모한 돌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마을에 틀어박힌 이치기 지대에게 M3 스튜어트들을 단독으로 보냈다가 전차 밑으로 대전차지뢰를 던져넣는 일본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상당한 피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치기 지대가 당시 기준 상당한 정예병이어서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보병은 전차처럼 강력한 장갑과 화력이 없는 대신, 넓은 시야와 탐색력을 가지면서 전차가 접근할 수 없는 거친 지형도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군 보병의 화력은 전차의 사각에서 [[대전차총검술]] 등을 시전하는 일본군 보병의 접근을 차단하는 용도로도 충분했다. 다만 이걸 일본군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태평양 전쟁 후반에 들어서는 미군 보병과 셔먼이 같이 진격해올 경우 일본군은 전차에는 큰 피해를 주기 힘들지만 보병에게는 치명적인 박격포를 쏟아부어서 일단 미군 보병들을 제거하거나 전열에서 이탈시킨 뒤 전차들만 남았을 때 일제히 대전차 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즐겨 썼다. 이 전술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셔먼 단독으로 다니는 건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험하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카즈 전차전이다. [[오키나와]] 전역에서 미 제139 전차 대대 소속 A중대의 셔먼 전차 30대는 보병부대와의 연락이 끊긴 채 단독으로 가카즈 고지를 돌파하다 대전차포 화망에 걸렸는데 단 한차례 전투에서 셔먼을 22대나 잃고 8대만 살아 도망쳤다. 지형상 전차의 이동제약이 굉장히 심한 깊은 곳에서 당하다보니 셔먼 전차는 매복된 대전차포가 어디에서 사격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돈좌된 셔먼 전차 사이로 일본군 보병이 대전차 총검술을 벌이며 달려들자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한 셔먼 승무원은 어찌나 다급했는지 후방의 27[[사단(군사)|사단]][* 미 육군 제27보병사단은 뉴욕 주 주방위군으로 1942년 초 하와이에 배치되어 주둔군 임무를 수행하고 1943년 하반기의 마킨 환초 상륙공격(연대급), 1944년 사이판 전투(사단급)를 치렀고 오키나와 전투 초기에는 미 육군 제10군의 예비부대로 대기하다 미 육군 24군단의 4월 19일 공세에 사단 전체가 일선 투입되었고 5월경에 미 해병사단과 교체되어 오키나와 중,북부에서 점령군으로 종사했다.]에 'HELP'라는 전신을 평문으로 계속해서 보냈다고 한다. 이는 미군의 태평양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차를 상실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치하]] 또한 이런 방법으로 몇 대의 셔먼을 잡기도 했으며 오키나와에서 작정하고 달려드는 일본군에 의해 800대의 셔먼중 153대의 셔먼을 완전 손실했다. 이는 미군으로 하여금 [[M26 퍼싱]]을 오키나와로 불러들이는 이유가 되었고 오키나와 방면의 일본군이 항복에 조인할 때 미군은 이 신형 전차를 항복 회담장에 도열시켰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한 M4는 4.7cm 1식 기동속사포 17발을 맞고서야 무력화당했다. [[보병]]이 없는 전차는 [[태평양]]의 셔먼이라 할지라도 위험해지는건 마찬가지라는 증명이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거의 죽음을 각오한 것이므로, 셔먼의 위상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셔먼을 많이 손실했다는 오키나와에서도 미군은 전차에 생채기만 나도 바로 바로 후방 정비대대에 수리를 보냈으며 그 와중에도 보충전차로 항상 전차부대의 정수를 유지시켰다. 결국 일본군 입장에서는 [[불사 부대#s-1.2|어제 한 대를 겨우 잡았는데 오늘 또 같은 수의 셔먼이 밀고 들어오고...]] 이하반복. 사실 오키나와 전역의 가카스 전차전 이전 [[이오지마 전투|이오지마 전역]]에서부터 셔먼이 본격적으로 대량 파괴당하기 시작했는데, 애초에 일본군이 처음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면서 '알아서 죽으러 와주던' 기존의 태평양 전선에서의 양상이 여기서부터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 처음 상륙하고 나서 기존과 다르게 저항이 없다가 갑자기 지뢰에 터지고, 심지어는 30여 톤짜리 셔먼이 장난감처럼 휙휙 날아다니질 않나,[* 이는 이오지마 자체가 화산섬인 데에 기인해 일본군이 적극 지뢰를 사용한 결과로, 화산섬인 이오지마의 모래에 사철이 장난 아니게 함유되어 있어 [[금속탐지기]]를 제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의 불발탄과 함께 지뢰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된 '장난감처럼 휙휙 날아다니던' 셔먼은 십중팔구 이 수에 당한 것이었다. 덕분에 해당 전투에 참가한 미군 셔먼 상당수가 [[https://www.paulooimodelworks.com/stuck-usmc-sherman-m4a3-in-iwo-jima/|측면에 나무 합판을 접합]]하는 현지 개수를 시행해 자력 감지식 [[지뢰]]만이라도 피해보려 하는 등, 온갖 수를 다 써서 지뢰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지금도 중동의 전쟁터에서는 비슷하게 불발된 항공폭탄 등으로 [[IED]]를 만들며 이런 무지막지한 IED는 60톤이 넘어가는 M1 전차라 할지라도 위험할 정도다. 더군다나 아군에게 IED를 처리하려다가 역으로 가는 길에 심어진 IED에 당하는 [[EOD]]도 있는 만큼, IED는 일반적인 지뢰쯤은 우습게 보일 불확정성과 위험성을 갖고 있기에 이를 막아보기 위해 현재 미군 차량도 이러한 현지에서의 임기응변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마인플라우를 다는([[: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brams_tank_with_mine_plow.jpg|#]]) 개수가 상당히 자주 쓰인다. IED가 터지지 않거나 터지기 전에 다른 흙더미와 함께 사이드로 치우면 좋고, 설사 터진다고 해도 보통은 막말로 차량 앞에 단 통짜 쇠쟁기만 부서질 뿐, 차량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된다. 또한 땅을 푹 파면서 나아가는 것이기에 사막과 같은 허허벌판에서는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아군을 위한 간이 엄폐호도 만들어 주니, 여러모로 유용한 해법인 셈.] 내륙으로 들어가니 잘 위장해놓은 야포와 4.7cm 1식 기동속사포를 위시한 대전차포 부대에 의해 한 전투에서 대략 30여대를 한꺼번에 잃는 등, 셔먼의 본격적인 고난은 이오지마 전투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가 처음은 아니며, 태평양 미군이 보전합동전술을 만든 것은 그보다 훨씬 전, 뉴기니의 밀림전투와 사이판 등 태평양 도서의 상륙작전에서 전차를 활용하면서부터였다. 섬지역의 일본군 진지들은 14인치 전함포탄의 사격을 버텨냈고, 고목이 들어찬 밀림은 야포사격의 효과를 줄였다. 그런 일제사격 뒤에 전차와 해병대 또는 육군이 진격할 때 일본군은 기습해 보병을 흩어놓고 고립된 전차를 공격했다. 이때 상당히 많은 손실을 봐서 미군은 전차의 후미에 보병이 전차장과 연락할 수 있도록 유선전화를 달았고, 보다 유기적인 협동작전을 하도록 교리를 개선해나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b2vjik_4A|태평양의 셔먼에 대한 다큐멘터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